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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MC (기독 실업인 협회. 개최 2014.5.1-3) 파리대회를 기념하여, 권순철, 손석, 임동락, 이배, 정하민, 진유영, NAM ('남' 작가명), 등 크리스챤 작가 7인전이 갤러리 퐁데자르 (Galerie Pont des Arts)에서 5월 1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이번에는 참여 작가들의 예술을 일반적인 미술비평적 관점이 아니라, 다소 독특한 신학적 관점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러한 방식은 현대에서는 낯설어졌지만, 미술과 문학을 포함하여 인류최초의 표현방식은 바로 신앙적 (혹은 주술적, 신학적) 방식이었으며, 이는 중세까지 지속되어왔던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진유영."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진유영 작가는 68년 5월 혁명의 여파가 가득한 그 다음 해인 1969년 프랑스에 도착했다. 혁명의 열기와 함께 "예술의 종말론"이 팽배한 상황에서 진유영은 "회화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이 과정에 그는 "회화가 무엇인가″보다도 "회화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 결국은 회화가 무엇인지를 보다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누구인가'보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면, '내가 누구인지'를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자각한다. '어디에 있는가'라는 시공간적인 질문은, '어떤 관계성 속에 (그것이 자연관계든, 대인관계든) 있는 지'를 알고자 하는 탐구이자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이 최초의 인간에게 물었던 "네가 어디 있느냐?"에 대한 질문의 연장으로, 이에 대한 개별적 실존적 특히 관계론적 대답이다 [cf."회화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차후, 진유영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겠다]. 이처럼 그가 어디에 있는 지 둘러보니, "주변 환경, 대상(오브제), 타인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 작가 자신이 있으며, 그들을 관찰하면 할 수록 그들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다. 거대한 이들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되고, 경외심을 가지고 타인에게 다가설 때, 의외로 많은 것들이 보였다. 자신이 크다고 생각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내가 작아지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보였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그의 주변에 이처럼 거대하고 경외심을 가지고 만나야할 이웃을 발견한 진유영은 어디있는가? 물론 그는 아틀리에에도 있지만, 아프리카에서도 그의 모습이 규칙적으로 발견된다. 그는 전쟁의 상흔을 가지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종교적인 것을 떠나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의사들이 자원하여 의료도움을 주는 단체인 알제리 국가기관 FOREM이라는 단체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웃들의 치유가 필요한 곳, 배고픈 곳, 그들이 갇힌 곳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하민.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마 18.3)

1980년 도불한 정하민 작가는 도불전이나 그 후나 한결같이, '시공간으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 태도(attitudes)의 유토피아'를 찾고 있다. <시작이요 만남이요 나눔이다> (2013, Huile sur toile, 130x161cm), <추억의 동반자> (2013, Huile sur toile, 80x80cm), <우리의 진실은 마음이다> (2013, Huile sur toile)라는 제목처럼, 그는 화업기간 내내 이러한 유토피아를 찾고 있는데,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바로 '어린아이들과 같아 질 때'(attitudes)이다. 정하민은 한국에 있을 때 10여년간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들로부터 순수한 동심을 배웠고, 이 <동심의 세계>가 그의 그림을 통해 재현되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추억의 재 탄생> 연작을 하고 있는데, 이 역시 <동심의 세계>에 대한 재 탄생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서서히 바뀌어 간 것은, 이전에는 동심의 구체적인 모습인 어린아이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제는 그림을 그리는 그 방법론에 있어서 어린아이들처럼, 즉 아무런 선입견과 편견 없이 그린다는 이야기다(제프 쿤스도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하고 그렇게 만든 작품이 <플레이-도 Play-Doh>이다). 그래서 정하민 작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아이들은 뭘 뚜렷이 그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색 하나 골라서 점하나 찍고, 또 색 하나 골라서 선하나 그립니다. 또한 색깔도 어떤 색을 골라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대로 혹은 즉흥적으로 마음에 끌리는 것을 잡아서 그립니다. 제 그림도 마찬가지로 점을 찍고, 선을 그리며 흔적도 만들고 삶의 궤적도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동심의 세계가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고 보고 있어요." 

하럴트 제만의 그 유명한 전시인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에서, 그가 의도했던 '형식'(form)에는 아직 다다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정하민의 작품은 위와 같은'태도'(attitudes)나 동기에서 꾸준히 현재적 '형태'(여기서는 형식과 태도의 의미로)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하민 작가는 청솔회(재불한인원로협회)의 회장으로, 파리의 '어르신'으로 가장 대접받고 존경받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겸손하고 겸허하게 파리 재불한인들을 섬기는 자세로 일관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이성과 열정, 남성과 여성, 로고스와 카오스, 프랑스와 한국, 등의 양극적인 현상의 사회에서 이를 부드럽게 조화하는 역할을 꾸준히 담당해왔다. 

 

권순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 26)

1989에 도불한 권순철 작가는 소나무협회 초대회장을 엮임했다. 그는 일찍이 대학교 때부터 한국인의 얼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 꾸준히 <얼굴>연작들을 발표해 왔다. 성형이 만연하고, 서구식 아름다움을 쫓는 한국정세에서 한국인 고유한 얼굴과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그의 작품은 그래서 현대에 더욱 절실한 그림이기도 하다. 

권순철 화가의 <얼굴>이라는 개념은 캔버스 위로 쌓이는 두꺼운 물감 층(層)만큼이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세월풍파를 모두 겪어낸 아줌마, 아저씨의 얼굴들. 비록 정확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얼굴에 상세하게 적혀있는 그들 삶의 고난과 역경을 보면 분명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이는 <얼굴>들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아줌마, 아저씨들의 얼굴이면서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필자는 권순철 작가의 <얼굴>연작을 오랫동안 보아오면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패러독스를 느껴왔는데, 이러한 고난과 슬픔의 <얼굴>에서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 천사와 같이 정결한 모습이 느껴지고,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얼굴에서 영원성의 모습이 보인다는 패러독스다. 

화폭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 얼굴의 주인공이 겪은 '삶'이 서서히 드러나고, 그의 '영혼'의 울림이 반향 되어 깊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림을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얼굴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익숙한' 대지 같기도, 흔들리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아버지의 등'이나 '신'(神)과 같이 든든한 '바위 (반석)' 같기도, 마음 속에 담고 살며 어려울 때마다 위안을 주는 어머니 같은 고국의 '산천'같기도 하다. 혹은 엄청난 인간을 품어 않고 끊임없이 우주를 달리고 있는 '지구'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그래선지, 오랜 시간과 고통을 겪어낸 인고의 <얼굴>에는 우주의 섭리가 담겨 있는 듯 하다.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으로 만들어졌지만, 에덴에서의 추방과 함께, 신의 형상은 알 수 없는 저 깊은 곳에 감춰진다. 그런데, 신이 만든 피조물인 또 다른 인간들, 동물들, 자연, 등과 어우러지고 만나고 부딪히면서, 인간의 모습이 조금씩 깎이며 사라지고, 대신 이웃, 혹은 "타자의 얼굴"이, 동물의 신음소리가, 고통 받는 자연의 일부가 자신의 살과 몸에 들어와 섞인다. 이처럼 외부가 자신의 내부로 그리고 자신의 몸이 찢겨서 외부로 떨어져 나갈 때, 어딘가에 깊이 감춰져 있던 신의 형상(Imago Dei)이 조금씩 <얼굴>에 드러난다. 마치 시공간에 의해 폐허가 된 고대 유적지나 유물들이 허물어짐에 의해 '영원성의 개입'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시공간과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아가 무너지고 떨어져 나간 자리에 외부가 들어온다. 이렇게 한 인간은 자라면서 '단수'(singulier)에서 점점 더 많은 '복수'(pluriel)가 되어진다. 때로는 영원히 "창문 없는 모나드"(라이프니츠)로 남기도 하지만… 

그래서 일까? 창세기 1장에서 신을 지칭할 때, 주어(히브리어 '엘로힘', 복수형 명사)는 복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동사(예를 들어, 히브리어 '바라'(창조하다) 3인칭 단수 동사)는 단수이다.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주의가 강한 한국인의 경우, '나'를 가리키면서도 '우리'라고 말할 때가 있다. 또한 10년전 불어논문을 쓸 때, 필자를 지칭함에도 불구하고 'je'라는 말보다 'nous'라는 말을 쓰는 것이 프랑스식 논문쓰기관례였다.) "우리의 형상"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복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 개개인 역시 신의 형상을 따라 나, 이웃, 자연이 함께임을 상징하기도 한다. 결국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혹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면 먼 훗날, 죽음 이후라도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마르틴 부버가 말하듯이,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는 의미이다. '너'와 '나'보다 중요한 것은 '와'(und)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복수의 관계를 암시하듯 권순철의 <얼굴>은, 대지이기도 <산>이기도 하며, 또한 <영혼>이기도 하고, <십자가> 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권순철 작가를 처음 인터뷰 했을 때, 그가 한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한국의 노인 분들 얼굴과 표정 속에, 우리 역사의 상흔이 있고 시간의 흐름이 있습니다. 기나긴 인고의 노동이 새겨진 얼굴, 수심에 지친 표정으로, 비록 늙고 주름졌지만, 순박하면서 근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월이 쌓인 노인들의 얼굴이 좋아요. 절망을 이겨낸 선한 얼굴들로, 이런 좋은 얼굴들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재불작가들에게 궂은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는 곳에는 항상 권순철 작가가 있다. 모래알같이 분산된다는 한국인들의 성격, 거기다가 독창적이며 특별한 작가들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재불작가들이 서로 도우며 아끼고 존경하며 돕는 이러한 분위기가 조성된 배경에는 땅에 심겨진 한 알의 밀알같은 마음을 지닌 권순철 작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대예술은 너무나 다양해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현대 예술'이라고 할 정도다. 이 같이 혼동스러운 포스트모던 후의 가상현실적 상황에서, 올해의 베르사이유 성의 초대작가인 이우환 작가에게 훌륭한 작품이 어떤 것인 지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현재, '합창교향곡'은 전 세계 다양한 입장의 국가들이 송년음악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하는 곡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의 곡이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하는 거에요. 베토벤이 살아있으면 나치나 어떤 나라에서 자기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기분 나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놀라운 거예요. […] 현대예술도 비록 오해의 여지가 있더라도 좀 더 멀리, 좀 더 깊이, 좀 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기를 가진 작품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심은록, 『양의의 예술. 이우환과의 대화 그리고 산책』, 현대문학, 2014)

현대성을 함축하는 듯 하면서도 또한 영원성의 성격을 포함하는 듯한 이우환 작가의 언급처럼, 훌륭한 작품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양의성을 지닌 예술"이라는 점이다. 이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 혹은 "0도의 글쓰기"라는 이론이 밑받침 되기도 했으며, 또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나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같이 타자의 현존에 대한 인식과 그 절대적 중요성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CBMC (기독 실업인 협회. 개최 2014.5.1-3) 파리대회를 기념하여, 권순철, 손석, 임동락, 이배, 정하민, 진유영, NAM, 등 크리스천 작가 7인전이 갤러리 Galerie Pont des Arts 에서 5월 1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된다. 파리지성707호(4월 16일자)에 소개했던 권순철, 정하민, 진유영 작가들에 이어, 이번 호에는 손석, 임동락, 이배, NAM 작가들을 소개한다. 이들의 예술을 기독교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양의적 해석 중의 하나임을 전제한다. 

 

손석. '기다림'과 '판단' 

(마태복음 25:1-13 ; 고린도전서 4:5)

1999년 이후, 손석 작가의 모든 작품제목은 <L'attente>(기다림)이다.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현재 만연해 있는 사무엘 베케트 식의 '부조리한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의 기다림 (마태복음 25:1-14)이다. 그래서 이 기다림은 희망이 있고 가슴 두근거림이 있으며, 때로는 조바심이나 두려움도 든다.  '기다림'은 또한 구약과 신약을 총괄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구약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옛 약속이라면, 신약은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는 새로운 약속이다. 

손석 작가의 예술에서 나타나는 <기다림>의 자세는 적극적인 에포케 (괄호치기, 판단중지)적인 자세이다. 감춘 것이 드러나기까지 판단하지 않고(고전 4:5), 그리고 판단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의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파리지성 N° 701, 702 참조]. 그래서 그는 적극적인 에포케적 자세로 판단을 중지하고, 그러나 두근거림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cf. 위르겐 몰트만)  

 

임동락. Kairotic encounter 

(잠언 8:17, 전도서 3:1-11, 

요한복음 5:24-25)

임동락 조각가에게 "점"(point)이 조각의 시작이라면, "빛"은 목적이다. 그의 작품 제목은 항상 "점"이라는 원제로 시작하는데,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각에는 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대신 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각을 평면에 표현하면 점이 되고 그리고 선이 됩니다. 각이 예리하면 선이 예리한 선이 되고, 각이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선이 되지요."

임동락 조각가의 작품에서 보면,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항상 점이 존재하는데, 한 세계와 다른 세계와의 교차점에서 점은 더욱 더 명료하게 드러난다. 즉,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 '점'이 발생하거나 혹은 여러 개의 선이나 면이 만나는 곳에 점이 포착된다. 그의 조각에서의 '점'은 바로 카이로스적 포인트 (kairotic point ou kairotic moment)의 카이로스적 만남 (kairotic encounter)이다. 연대기적 일상적 만남이 아니라, 수직적 새로운 차원의 만남이다. 신, 우주, 인간의 만남이자, "나와 너"의 만남이다 그래서 임동락 조각가의 작품 <Point-The gate of Space>(2007)에서 재현되었듯이, 시간적으로 카이로스적인 순간은 공간적으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우주를 여는 <우주의 문>이기도 하다. (cf. 마르틴 부버)

 

이배. 창조적 언어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les mots)과 '사물'(les choses)의 정확한 일치가 이루어졌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담이 하나님과 대화할 때, 의미하는 것 (signifiant 기표)과 의미 되는 것 (signifié 기의)이 정확히 일치 되었다. 말이 곧 행위 (실천)이자 사물이며,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이 일치했다. 어쩌면 최초의 언어는 리듬이 있고, 향기가 나며, 진동이 있는 촉각적인 언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덴의 추방과 바벨탑 이후, 모호하고 양의적(혹은 다의적)인 세상처럼 언어도 그렇게 되었다. 라캉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기표가 기의 아래서 영원히 미끄러진다. 이러한 현상이 이배 작가의 최근 작품에 잘 드러난다. 같은 이미지를 세 번 반복하지만, 그 세 이미지는 결코 일치하지 않으며, 또한 이미지 간에는 메디엄이 영원히 미끄러지고 있다 [파리지성 N° 704, 705, 706 참조]. 마치 하나님의 언어, 신성한 언어(고전 히브리어, 고전 헬라어, 라틴어), 속세의 언어의 '차연'(différance)을 상징하는 것도 같다. 바로 이 차연을 인정하는 것은 절대자와 유한자, 창조자와 피조자의 차이를 지혜롭게 인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인간세계에서는 나(혹은 동일자)와는 다른 타자의 존재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cf. 엠마누엘 레비나스).  

 

NAM .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시편 91:4)

NAM 작가는 오랫동안 '날개'를 주제로 작품을 해왔다. 그의 작품과정을 보면, 주르룩 흐르는 눈물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있다. 때로는 여러 사람의 눈물들이 모인 듯 여러 가닥의 눈물들이 뭉쳐있다. 이렇게 형상화된 <눈물> 연작에서는 <날개>의 원형적인 모습이 드러나며, 반대로 <날개> 작품에서는 흐르는 눈물이 연상된다. 그리고 이 날개는 때로는 무언가를 알리고 싶어 어딘가를 가리키는 그러한 손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고통 당하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었을 때, 그 눈물은 날개로 변화되는 듯, 그리고 억압, 고통, 약함의 눈물이 해방, 기쁨, 강함의 날개로 변화되는 듯 하다. 

NAM작가의 최근 '유리 블로잉 및 조각과 세라믹' 작품에는 두 개의 날개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날개만 등장한다.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은유적 모습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하나의 날개를 가지고 태어난다. 원래의 날개는 주체의 몸집에 비교하면 너무나 작아서 마치 오래 전에 우리가 잃어버렸던 날개의 자취를 알려주려는 것 같다. 원래는 "살아있는 영"(창 2:7)으로 창조된 사람들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신의 손길이 닿았던 그 자취(창 2:7)를 알려주는 것도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하나의 날개로는 날 수 없기에, 두 번째의 날개를 가지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 다른 사람들은 권력, 혹은 재물이란 이름의 날개를 달려고 헛된 노력을 한다. 그러나,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생각했을 때, 그래서 너와 내가 하나일 때, 그 때 마침내 두 개의 날개가 되어 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cf.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제임스 콘).

 

"CBMC파리대회 특별전

참여작가. 권순철, 손석, 임동락, 이배, 정하민, 진유영, NAM.

전시장소. Galerie Pont des Arts 

4 rue Peclet 75015 Paris 

M. Commerce

전시기간.  2014년 5월 1일(목)부터

 5월 14일(수)까지

월-토 14시-1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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